
2012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 강입자 충돌기(LHC)는 현대 물리학의 표준 모형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인 힉스 입자(Higgs boson)를 발견하며 인류 지성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이 위대한 성공은 하나의 시대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더 심오한 질문들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발견된 힉스 입자는 과연 표준 모형이 예측한 것과 완벽히 같은 입자인가? 그 성질 너머에는 어떤 새로운 물리가 숨어 있는가? 우주의 95%를 차지하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전 세계 물리학계는 LHC의 뒤를 이을 ‘차세대 입자 가속기’ 건설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LHC의 현재 위치를 짚어보고, 미래의 두 주역인 국제 선형 충돌기(ILC)와 미래 순환 충돌기(FCC)를 중심으로 차세대 가속기의 목표와 특징을 비교 분석합니다.
위대한 성공, 그리고 새로운 질문: LHC의 현재 위치
LHC는 둘레 27km의 원형 터널에서 양성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해 충돌시키는 장치입니다. 그 핵심 목표는 높은 충돌 에너지를 통해 새로운 입자를 ‘발견’하는, 에너지 개척(Energy Frontier) 가속기였습니다. 힉스 입자 발견으로 그 소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며, 현재는 성능을 대폭 업그레이드하는 고광도 LHC(High-Luminosity LHC, HL-LHC) 프로젝트를 통해 2029년부터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여 힉스 입자의 성질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LHC는 태생적 한계도 지닙니다. 양성자는 쿼크와 글루온으로 이루어진 복합 입자이므로, 양성자 간의 충돌은 수많은 입자 파편이 동시에 쏟아지는 ‘지저분한(messy)’ 환경을 만듭니다. 이는 마치 두 개의 수박을 충돌시켜 그 안의 씨앗 하나를 연구하려는 것과 같아, 정밀한 측정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왜 새로운 가속기가 필요한가?: ‘정밀 측정’과 ‘에너지 개척’
차세대 가속기의 필요성은 크게 두 가지 전략적 목표로 요약됩니다.
- 정밀 측정 (Precision Measurement): 힉스 입자의 질량, 수명, 다른 입자와의 상호작용 강도 등을 표준 모형의 예측과 소수점 아래 수많은 자릿수까지 비교하여 미세한 차이라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만약 예측과 다른 점이 발견된다면, 이는 표준 모형 너머의 새로운 물리 법칙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간접 증거가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양성자 대신 전자나 양전자 같은 기본 입자를 충돌시켜 매우 ‘깨끗한(clean)’ 환경에서 대량의 힉스 입자를 생산하는 ‘힉스 팩토리(Higgs Factory)’가 필수적입니다.
- 에너지 개척 (Energy Frontier): LHC의 에너지(최대 14 TeV)로도 발견되지 않은, 더 무거운 미지의 입자(초대칭 입자, 암흑물질 후보 등)를 직접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LHC를 압도하는, 현존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의 충돌 에너지를 구현해야 합니다.
후보 1: ‘정밀함’의 극한, 국제 선형 충돌기(ILC)
국제 선형 충돌기(ILC, International Linear Collider)는 이름 그대로 선형(Linear) 가속기입니다. 약 20km 길이의 직선 터널 양 끝에서 전자와 양전자를 발사하여 중앙에서 충돌시킵니다.
- 주요 특징: 전자-양전자 충돌을 통해 매우 깨끗한 환경을 제공하며, 힉스 입자를 정밀하게 연구하는 ‘힉스 팩토리’의 대표주자입니다. 충돌 에너지를 250 GeV에서 시작하여 향후 1 TeV까지 단계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 장점: 원형 가속기에서 전하를 띤 경입자(전자 등)가 가속될 때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 손실(싱크로트론 방사)이 없어, 높은 에너지의 전자-양전자 충돌에 유리합니다.
- 현황: 일본이 유치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현재 국제 협력을 통한 프로젝트 실현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후보 2: ‘강력함’의 정점, 미래 순환 충돌기(FCC)
미래 순환 충돌기(FCC, Future Circular Collider)는 CERN이 제안하는 거대 프로젝트입니다. 스위스 제네바 지하에 LHC보다 3배 이상 큰 둘레 약 91km의 새로운 원형 터널을 건설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 주요 특징: 두 단계로 구성된 원대한 계획입니다.
- 1단계 (FCC-ee): 새 터널에 전자-양전자 충돌기를 먼저 건설하여, ILC를 능가하는 성능으로 수백만 개의 힉스 입자를 생산하는 궁극의 ‘힉스 팩토리’를 목표로 합니다.
- 2단계 (FCC-hh): 1단계 운영이 끝난 터널에 초전도 자석 기술을 총동원하여 양성자-양성자 충돌기를 설치, 100 TeV라는 전례 없는 충돌 에너지를 구현하여 에너지 개척의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 장점: 하나의 거대 인프라를 통해 정밀 측정(FCC-ee)과 에너지 개척(FCC-hh)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의 거대 원형 충돌기 CEPC/SPPC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한눈에 보는 비교: LHC vs ILC vs FCC
구분 | 고광도 LHC (HL-LHC) | 국제 선형 충돌기 (ILC) | 미래 순환 충돌기 (FCC) |
---|---|---|---|
운영 주체 | CERN (유럽) | 국제 컨소시엄 (일본 유치 유력) | CERN (유럽) |
형태 | 원형 | 선형 | 원형 |
충돌 입자 | 양성자 – 양성자 | 전자 – 양전자 | 1단계: 전자-양전자 (ee) 2단계: 양성자-양성자 (hh) |
터널 크기 | 둘레 27 km | 길이 약 20.5 km | 둘레 약 91 km |
충돌 에너지 | 14 TeV | 0.25 ~ 1 TeV | 1단계: 0.09 ~ 0.365 TeV (ee) 2단계: 100 TeV (hh) |
주요 목표 | 힉스 특성 연구 (데이터 양 증가) | 정밀 측정 (힉스 팩토리) | 정밀 측정 + 에너지 개척 |
인류 지식의 다음 장을 열기 위한 거대한 도전
차세대 가속기 프로젝트는 단순히 더 크고 강력한 기계를 만드는 것을 넘어, 우주에 대한 인류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여정입니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과 수십 년의 건설 기간, 그리고 전 세계 수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의 협력이 필요한 거대한 도전입니다.
정밀 측정을 우선할 것인가, 에너지 개척에 먼저 도전할 것인가. ILC와 FCC를 둘러싼 논의는 세계 입자물리학계의 미래 전략을 결정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어떤 길이 선택되든, 그 끝에서 인류는 분명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주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왜 어떤 가속기는 원형이고 어떤 가속기는 선형인가요?
A: 양성자처럼 무거운 입자는 원형 터널에서 자기장을 이용해 궤도를 휘게 해도 에너지 손실이 적어 반복적인 가속에 유리합니다. 반면 전자처럼 가벼운 입자는 원형으로 돌 때 ‘싱크로트론 방사’라는 현상으로 막대한 에너지를 빛으로 방출하여 손실이 큽니다. 따라서 초고에너지 전자 충돌에는 에너지 손실이 없는 선형 가속기가 더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Q2: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이런 연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입자 가속기 연구는 우주가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인류의 근원적 호기심을 탐구하는 기초 과학입니다. 당장의 실용성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극한의 기술 개발 과정에서 파생되는 의료(입자 치료), 신소재, 컴퓨팅(월드와이드웹의 탄생) 기술 등은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Q3: 차세대 가속기는 언제쯤 건설될까요?
A: 이는 국제적인 정치 및 재정적 합의에 달려 있어 예측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현재 유럽의 입자물리학 전략 업데이트에 따르면, FCC 프로젝트가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으며 만약 승인된다면 2040년대 중반부터 FCC-ee의 운영을 시작하고, 2070년대부터 FCC-hh를 운영하는 것을 장기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ILC 역시 국제 파트너십이 확보된다면 비슷한 시기에 건설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